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모데스트 무소륵스키 (문단 편집) == 생애 == 무소륵스키는 대대로 부유했던 지주의 아들로 태어나 6세라는 어린 나이부터 어머니에게서 피아노를 배웠고 배운지 3년만에 가족들과 친구들을 위해 [[프란츠 리스트|리스트]]의 소품을 연주할 수 있었다. 가문의 전통인 군 복무를 위해서, 그는 13세 때 근위 사관 학교에 입학하였는데, 그를 평생 괴롭혔던 알코올 중독 증세는 이곳 생활에서부터 비롯된 것이라는 추측도 있다. 사관학교 졸업 후 그는 프레오브라젠스키 수비대에 입대하여 군 복무를 시작한다. 그의 군 생활은 음악적으로는 여러 유력 음악가를 만나는 좋은 기회가 되었다. 군 복무 중, [[상트페테르부르크]]의 군 병원에서 [[군의관]]으로 복무하던 [[알렉산드르 보로딘]]을 알게 되었고 이내 친해지게 된다. 그리고 [[미하일 글린카]] 이후의 가장 유력한 작곡가인 알렉산드르 다르고미시스키와 친분을 쌓게 되는데, 이것은 그에게 큰 영향을 끼친다. || [[파일:external/upload.wikimedia.org/Mussorgsky_Repin.jpg|width=300]] || || 1881년 죽기 얼마 전의 무소륵스키[* 무소륵스키가 죽기 직전 [[일리야 레핀]]이 그린 초상화. [[알코올 의존증]]의 영향으로 코가 빨갛다. 모친의 죽음으로 시작된 그의 [[술버릇]]은 친구의 죽음으로 절정에 달했고 결국에는 빈털털이 신세로 전락하고 말았다. 이 그림에서 입고 있는 잠옷 역시 가난뱅이로 전락한 그의 신세를 딱히 여긴 그의 친구 한 명이 보내 준 것이다. --코도 빨갛고 눈까지 풀린거 보면 이미 술에 잔뜩 거하게 취한 모습을 그려준 것 같기도...--] || 이러한 교우관계는 음악적으로 매우 중요한 계기로서, 그의 진짜 음악 인생은 이 시기로부터 시작된다는 견해도 있다. 무소륵스키는 [[세자르 큐이]], [[밀리 발라키레프]] 등과도 교우관계를 맺었는데, 후에 발라키레프로부터 작곡을 배운다. 그는 1858년 군을 떠나 음악에 전념하고, 초기에 발라키레프에게 음악을 배운 이후로는 그는 독습하다시피 하여 실력을 쌓는다. 이 후, 교향시 "민둥산의 하룻밤"으로 음악인으로서의 기초를 완전히 닦았고, 1863년 5인의 동지들과 공동 생활을 하는 등, 전성기를 맞는다. 이 무렵부터는 더 이상 발라키레프의 인정을 받으려 애쓰지 않고, 예전의 다르고미시스키와 더 가깝게 지낸다. 다만, 개인적으로는 1861년 농노 해방으로 인해 토지의 반 이상을 잃게 되어 점차 생활고에 시달리기 시작하고, 1865년 어머니의 사망으로 큰 충격을 받아 [[알코올 의존증]]이 시작되는 시점이기도 하다. 그의 이러한 전성기는 안타깝게도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. 이르게는 "보리스 고두노프"가 작곡된 1868년부터 1873년, 늦게는 [[전람회의 그림]]이 작곡된 1874년 이후로 인생의 쇠퇴기가 시작된다. 그의 알코올 중독은 점점 심해져갔고, 친한 친구들의 잇따른 죽음으로 인해 정서적으로도 큰 슬픔에 빠지게 된다. 날로 심해지는 알코올 중독 때문에, 생계를 위해 택했던 공무원 생활도 위태위태하다가, 결국 1880년에 해고되어 생계수단이 끊긴다. 그로부터 1년 후인 1881년에는 구걸 밖에 할 것이 없다고 친구에게 말할 지경으로 궁핍해진다. 이 무렵 건강도 심각하게 나빠져서, 4번의 연속된 발작을 일으켰고, 그로 인해 입원을 한다. 입원 중에도 건강은 계속 악화되어, 1881년, 그는 만 42세라는 많지 않은 나이로 사망한다. 42번째 생일 일주일 후였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